우리말, 그리고 사람
우리말, 그리고 사람

우리말, 그리고 사람 한글 활자, 유구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관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이재정 학예연구관

<<쉼표, 마침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간단한 소개와 인사 부탁드립니다.

이재정

 안녕하세요.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이재정입니다. 2000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입사해 유물관리부·역사부 등을 거쳐, 2018년에 국립한글박물관 전시운영과에서 근무하다 작년 초에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과로 발령받았습니다. 전시과에서는 우리 문화재를 국외에 소개하고, 외국 박물관에 있는 한국실을 지원하는 업무를 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쉼표, 마침표.>>

이재정 연구관님께서는 활자를 연구하고 계시는데요. 활자를 연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재정

 제 전공은 중국 역사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아시아부, 역사부가 신설되면서 입사하게 됐는데 입사 당시 부서가 마련되지 않아 유물관리부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는 전시실에 있는 유물보다 훨씬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데 새로운 전시를 열게 되면 수장고에 있는 유물을 꺼내 관람객들에게 공개하고, 전시가 끝나면 수장고에 반납합니다. 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유물을 출·격납하는 일을 맡으면서 활자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얼마나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그만 예쁘고 신비로운 글자에 반해 2004년부터 활자를 연구하게 됐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한글 금속 활자

<<쉼표, 마침표.>>

국립중앙박물관은 2006년에 처음으로 한글 금속 활자를 공식 조사합니다. 이재정 학예연구관님께서는 그 업무를 맡으셨고, <<한글금속할자>> 자료집도 발간하셨습니다. 한글 금속 활자를 공식 조사하게 된 과정과 성과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이재정

 200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역사부가 신설되면서 <<역사자료총서>>를 발간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2006년 연초에 기획을 하고 연말에 자료집을 내는 일정으로, 수장고에 있는 한글 금속 활자 750여 점을 대출받아 사진을 찍고 17~18세기 언해본(다른 나라 글, 특히 한문으로 된 내용을 한글로 풀어서 쓴 책)에 있는 글자와 한글 금속 활자를 일일이 대조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17~18세기에 간행한 언해본을 주로 조사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한자 활자 대부분이 이 시기에 쓰인 것이어서 한글 활자도 같은 시기에 쓰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한글 금속 활자는 이 시기 언해본에 사용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750여 점 가운데 30여 점은 글자체가 다르더군요. 서지학자에게 자문받으니 계열이 다른 글자라고 말씀하셔서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글자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꽤 많이 고민했습니다. 9월 어느 날 국립중앙박물관이 야간 개장을 하는 수요일 밤이었습니다. 마감하기 전, 한글실 전시장을 둘러보는데 제가 찾고 있던 글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앞서 말한 30여 점 가운데 하나인 ‘깃’이라는 글자였습니다. 종성이 삿갓 모양처럼 큰 것이 특징이었는데, 한글실에 전시된 <<두시언해(1481)>>에 그 글자가 있었고, 사무실로 돌아가 <<두시언해>>가 무슨 활자로 찍은 것인지 찾아보니 1455년에 제작한 을해자였습니다. ‘내가 지금 조선 전기에 쓰인 을해자와 함께 쓰인 한글 활자를 찾은 건가’라고 생각하며 을해자병용 한글 활자로 찍은 찍은 최초의 책 <<능엄경언해(1461)>>에 있는 글자와 30여 점의 한글 금속 활자를 대조해 보니 일치했습니다. 그래서 보존과학부에서 이 활자들의 금속 성분을 검사했고, 나머지 한글 금속 활자와 성분이 다르다는 답변을 얻었습니다. 1461년 이전에 만든 한글 활자가 확인된 것이지요. 한글 금속 활자를 조사하며 시기에 따라 활자 모양뿐만 아니라 글자체도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 내용을 국내 최초 한글 금속 활자 연구보고서인 <<한글금속활자>>에 발표했습니다. 2007년 1월 초에 조선 전기 한글 금속 활자를 발견한 내용을 보도자료로 발표하며 당시 언론에서 많은 집중을 받았습니다.

▲<<한글금속활자>>(왼쪽),
을해자병용 한글 금속 활자의 글자체(오른쪽)

<<쉼표, 마침표.>>

작년 6월에 인사동에서 한글 금속 활자가 나와 많은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한글 금속 활자에 관해 말씀해 주세요.

이재정

 인사동에서 나온 금속 활자는 1,600여 점으로 한글 활자와 한자 활자가 섞여 있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한글 금속 활자는 을해자병용자와 을유자병용자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립중앙박물관이 보유한 한글 금속 활자 가운데 30여 점이 바로 을해자병용 한글 금속 활자인데, 소자만 있었습니다. 인사동에서 출토된 한글 금속 활자에는 을해자병용 대·소자가 함께 있습니다. 또 처음으로 1465년에 만든 을유자와 함께 사용한 을유자병용 한글 금속 활자도 나와 한글 금속 활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국가의 중요한 보물인 금속 활자가 한글로도 만들어졌다는 것은 조선이 당시 한글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특히 한글 금속 활자는 세종부터 세조 때까지 주로 만들어졌는데, 이 시기에 출판으로 한글을 보급하겠다는 조선 왕들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해석됩니다. 또 금속 활자는 값비싼 구리로 만들기 때문에 사용하다 닳아서 쓰지 못하게 되면 녹여서 새 활자로 만들거나, 분실되기도 했는데 이처럼 남아 있기 어려운 한글 금속 활자가 발견되어 학계에서는 의미 있는 결과물로 주목하고 있습니다. 한편, 한자금속 활자는 을해자가 주를 이루고 세종 때 만든 갑인자도 나왔습니다.

▲인사동에서 발굴된 한글 금속 활자
(사진 출처: 문화재청)

<<쉼표, 마침표.>>

그런데 한글 활자 이름이 한자 활자인 갑인자로 소개되거나 한글 활자로도 소개되었더라도 이름이 잘못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왜 이런 실수가 생겼을까요?

이재정

 가장 큰 이유는 한자 활자 이름과 한글 활자 이름을 구분하지 않고 쓰기 때문입니다. 옛 활자는 주로 간지 이름을 따서 붙였습니다. 예를 들어 을해자는 을해년에 만든 활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활자들은 모두 한자입니다. 한자와 함께 쓰인 한글 활자는 따로 이름이 없어서 연구자들이 한자 활자 이름에 ‘병용’이라는 단어를 붙였습니다. ‘을해자병용’이라고 하면, ‘을해자와 함께 쓰인 한글 활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울러 같이 씀’이라는 뜻의 병용은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단어이기 때문에 전시실에서는 ‘OO자와 함께 사용한’이라고 풀어서 쓰기도 합니다. 한글 활자를 부르는 이름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한글 활자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으나, 조선시대 공식 문자는 한자였으므로 대부분 출판물은 한자로 된 책이었고, 한글 활자는 필요에 따라 언해본을 출판하기 위해 만들어 썼습니다. 그런데 이 한글 활자가 한자 활자와 같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글 활자의 제작 시기에 혼동이 생깁니다. 한글 금속 활자가 최초로 쓰인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은 1447~1449년에 만들어졌고, 여기에 쓰인 한자 활자인 갑인자는 1434년에 만들었습니다. 이번에 출토된 활자 중 갑인자로 파악되는 것이 수십 자가 있는데 갑인자는 한자일뿐더러 훈민정음 창제(1443년) 전에 만들어졌으므로, 한글 활자가 갑인자일 수 없습니다.
 또 인사동에서는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법(세종 때 중국 한자 발음을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기 위해 만든 훈민정음 표기법)에 쓰인 한글 금속 활자들이 발견됐는데요. 동국정운식 표기법은 15세기까지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한글 활자를 세종이 만든 갑인자와 함께 쓴 한글 활자로, 또는 갑인자로 오해하시기도 하는데,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에 쓰인 한글 글자체와는 다르고 <<능엄경언해>> 등에 쓰인 을해자병용 한글 금속 활자의 서체와 같습니다.

<<쉼표, 마침표.>>

한글 활자 연구 현황이 궁금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한글 활자를 연구하시는 분은 몇 분이나 계실까요?

이재정

 한글 금속 활자가 나온 것에 모두 주목하지만 사실 이에 관한 관심과 연구는 매우 부족합니다. 저 역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활자를 고증하는 연구를 시작할 때 특별히 한글 활자에 관심을 두지는 않았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약 83만 점의 활자가 있고 한글 활자는 금속 활자 750여 점, 목활자 1만 3천여 점으로, 활자 대부분이 한자 활자입니다. 이 한글 활자는 국립중앙박물관 등록 명부에 크기와 재질에 따라 한글 금속 활자 대자와 소자, 한글 목활자 대자와 소자로만 구분되어 있고 어디에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다. 1960~1970년대부터 서지학계에서 활자와 서적을 연구하며 한글 활자도 다루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글 금속 활자를 고증했을 당시 한글 금속 활자만으로 연구 성과를 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사실 활자라는 측면에서 한글 활자만을 따로 연구할 수는 없습니다. 타이포그래피(편집 디자인에서 활자의 서체나 글자 배치 따위를 구성하고 표현하는 일) 작업을 하시는 분들이 옛 활자의 글자체 특징과 변천 등을 연구하시고 옛 글자체를 활용한 글자체를 개발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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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 학예연구관님은 국립한글박물관 전시운영과에서 계실 때 <<문자 혁명 - 한국과 독일의 문자 이야기>> 전시를 기획하셨습니다. 이 전시로 관람객들에게 어떤 사실을 알리고 싶으셨나요?

이재정

 국립한글박물관에서 근무하며 한글 글자체와 활자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서양활자와 우리 전통활자는 재질, 모양, 조판 방법, 목적 등 모든 면에서 다릅니다. 반면 문자 생활에서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에 금속 활자를 세계 최초로 발명했고, 조선 시대에 세종대왕께서 금속 활자를 개량해 한글 활자와 한자 활자로 지식을 전파합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도 세종대왕이 금속 활자를 개량한 지 20여 년 후에 금속 활자를 발명하고 인쇄술을 발전시킵니다. 우리가 한글과 한자를 함께 사용했듯이 독일에서도 라틴어와 독일어를 함께 사용했는데, 저는 이 전시에서 두 문자 간의 번역을 하나의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즉 조선은 한글 활자로 한자로 된 유교 경전을 언해본으로 찍어 보급해 유교 사회 기틀을 마련했고, 독일은 독일어로 루터성서를 출간해 개신교가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글자체도 흥미롭습니다. 우리나라는 궁체가 독일은 프락투어체가 민족과 각 나라 문자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작용했습니다.

<<쉼표, 마침표.>>

한글 활자와 글자체는 떼려야 뗄 수 없을 듯합니다. 글자체에 관해서도 한 말씀 듣고 싶습니다.

이재정

 한글 활자뿐만 아니라 활자의 실체는 기본적으로 글자체로 판단합니다. 일반적으로 초창기 인쇄본의 글자체는 필기체를 모방하는데 한글은 이와 달리 돋움체에서 점차 붓글씨 쓰기에 맞는 글자체로 변화했습니다.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 그대로를 글자에 구현된 것에서 붓글씨라는 재료에 맞게 자모의 배치와 획이 변화한 것입니다. 그 정점에 있는 글자체가 바로 궁체입니다. 19세기에는 손글씨의 궁체를 그대로 재현한 활자들이 만들어집니다. 요즘 궁체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진지함의 대명사로 쓰이는데 19세기에는 세련된 글자체였다는 점이 매우 재미있습니다. 가끔 예능 방송에서 다양한 옛 글자체들이 자막으로 활용되는 점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쓰는 한글 글자체 이름에 대해서는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명조체는 명나라 글자체, 고딕체는 서양 중세 글자체에서 비롯됐는데 우리나라가 일본 인쇄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명조체, 고딕체 등 용어가 정착되었습니다. 1990년대 문화체육관광부가 고딕을 돋움으로, 명조를 바탕으로 글자체 용어를 바꿨지만 아직도 통용되어 사용되고 있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 의미를 알면 달리 보이지 않을까요?

<<쉼표, 마침표.>>

흥미로우면서도 유익한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한글 활자 연구를 하시며 느끼셨을 보람과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지요.

이재정

 활자를 찾는 작업은 눈과 인내심이 있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찾아 헤맨 활자를 고서에 있는 글자 하나하나와 맞춰 가며 그 정체를 알아 갈 때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큽니다. 수장고에 잠들어 있던 한글 금속 활자를 깨워 사람들에게 알리고, 인사동에서 출토된 한글 금속 활자로 인해 국립중앙박물관 한글 금속 활자가 다시 주목받는 점은 활자 연구자로서 매우 보람 있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앞으로는 한글 활자 이름이 적어도 ‘OO자병용’으로 불리지 않게 이름을 지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한글 활자 하나하나 쓰임과 의미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연구하고 싶습니다. 또 고서에는 개성 있고 멋진 글자체들이 많은데 좀 더 널리 알려지고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내년 여름에 퇴직이 예정되어 있지만, 그동안 학예연구관으로서 참 재미있게 활자를 연구할 수 있어서 운이 좋았고, 또 영광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웃음)

글: 고승희
사진: 김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