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좋은 글, 듣기 좋은 말
읽기 좋은 글, 듣기 좋은 말

읽기 좋은 글, 듣기 좋은 말 이기적인 공감은 없다

 학교서 돌아오는 아이가 가방을 끌고 들어오며 “엄마, 나 좀 쉴게요.”란 말을 툭 던지더니 제 방으로 들어간다. 아이 말에 엄마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혹은 이런 경험이 있었다면, 당사자로서 어떤 답을 들어 봤는가? 이 상황에서 엄마가 하였음 직한 말을 딱 5초만 생각해 보고 가자.
 ‘나 좀 쉴게요.’에 대한 엄마의 대답으로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무슨 일인데?, 무슨 일 있니? 말 좀 해 봐.’와 같은 유형이다. 흔히 캐묻기라고 한다. 캐묻는 말을 들은 아이의 마음은 편하지 않을 것이다. 속으로는 ‘뭘 그리 알고 싶으신가요? 그래도 지금은 좀 참으시죠. 제가 좀 힘들거든요.’와 같이 말하고 있지 않겠는가?
 한국 사회에서 좀 더 현실적인 다른 반응도 있었다. ‘쉬다니? 학원 가야지.’, ‘저 또 하기 싫어 저런다. 숙제는 안 할 거니? 그러다가 너 뭐 될래?’와 같은 다그침이 있다. 경고와 훈계 유형이다. ‘나 좀 쉴게요.’라며 자기 의사를 먼저 말하는 아이라면 적어도 부모와 소통을 하려는 의지가 있는 아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계가 시작되면 ‘또, 또 저러신다.’고 하는 혼잣말이 마음에서 꿈틀거리면서 다음에는 소통의 시도조차 접을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응답 유형을 소개해 보자. ‘그러니까 어제 일찍 자라 그랬지? 안 자고 꾸물거릴 때 내가 알아봤다.’는 분석과 충고형이 있다. 아무리 부모님의 관심을 받고 싶더라도, 부모의 분석 대상이 되고 싶은 아이는 없을 것이다. 두려운 사실은 이런 말을 듣는 아이도 머지않아 부모의 언행을 분석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요? 지난번에 엄마는 어땠는데요? 엄마도 그랬잖아요.’와 같은 말이 나와도 부모는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감정을 이입하면 문제가 커진다. ‘아이고, 그렇구나.’, ‘불쌍해라. 얼마나 학교서 힘들었으면….’과 같은 말을 들었다는 학생들도 많았다. 동정형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으면 더 갑갑해진다고 한다. 단지 쉬겠다고 했을 뿐인데 너무 앞서 나가시면 말문이 막힌다는 것이다.
 이 응답들은 ‘사고방식과 표현’에 대한 수업에서 대학생들이 털어놓은 경험이었다. 캐묻기형 부모는 단지 궁금해서 물었을 뿐이고, 경고와 훈계형에서는 미래를 알려줬을 뿐일까? 아이에 대한 관심 때문에 아이를 분석했고, 한없는 사랑으로 동정한 것뿐인데 그것이 죄냐고 되물을 것인가? 모두 듣는 사람 처지를 앞세운 어설픈 합리화이다. 이처럼 이기적인 방어는 말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공감은 남의 감정이나 의견에 대해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기분이다. 만약 누군가의 견해에 같은 생각을 가진다면 그 생각에 동감한다고 한다. 캐묻거나 훈계하는 것, 분석하고 동정하는 것은 분명 공감이 아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생각하기보다 판단하고 비판하고 결과를 단정 짓느라 정작 아이의 말에는 집중하지 못했다.
 ‘라떼는 말이야.(나 때는 말이야.)’란 분위기를 모르고 자기 경험담을 늘어놓는 인생 선배를 비꼬는 유행어이다. 이제는 ‘라떼’라고만 해도 웬만큼 알아들을 만큼, 이 사회는 공감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이 말은 비단 나이 많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나 중심 말하기, 이기적인 말하기’에도 소통의 귀는 닫힌다. 듣고 싶은 말이란 자기 행동에 필요한 말, 대화 목적이 뚜렷한 말,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말, 칭찬해 주는 말 등이라는 대중의 응답이 있다. 딱 잘라서 판단하고 분석하고 결론을 내리는 말이 들어갈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 현장을 지나가게 되었다. 아직 교통경찰도 도착하기 전이라 현장은 처참했다. 차바퀴로 다친 사람 곁을 지나가기조차 죄스러운 상황이었다. 지인들에게 금방 사고 난 현장을 거쳐 왔다고 했더니 ‘왜 사고가 났대?’, ‘사람은 얼마나 다쳤어?’와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혹은 ‘나도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라며 유사한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날 어른들 대부분의 대화는 그렇게 흘러갔다. 퇴근을 하여 어린 아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오늘 엄마가 출근하는데…’로 시작한 이야기 끝에 어린아이가 한 말은 “엄마 참 무서웠겠다.”였다. 아이는 당시의 엄마 마음을 알아주었다. 종일 놀랐던 마음이 비로소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공감이란 누군가가 그저 그 사람의 처지에서 말해 주는 것이다. 아직은 엄마가 전부인 어린 아들이었기에 다른 정보보다 엄마 마음에 몰입해 준 것이 아닐까 한다.
 정보 중심 사회가 되면서 듣기의 문턱이 더 높아졌다. 공감과 경청이 화두인 것은 그것을 잘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감과 경청이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나의 관계를 지키려면 꼭 배워야 하는 삶의 기술이 분명하다.

글: 이미향(영남대학교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