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민정음으로 바라본 한류
돌민정음으로 바라본 한류

돌민정음으로 바라본 한류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한글 열풍
돌민정음과 열성 팬 번역가

 * 이 글에서 소개한 ‘돌민정음’의 사례들 중에는 국어 어문 규정에서 벗어난 경우가 있습니다만, 현재 해외에서 통용되고 있는 표기 그대로를 소개하기 위해 국어 어문 규정에서 벗어난 표기이더라도 그대로 두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탄식할 때는 “Aigoo(아이구)”, 응원할 때는 “Hwaiting(화이팅)”, 감탄할 때는 “Daebak(대박)”을 쓴다. 알파벳에 담긴 이 친숙한 한국어의 화자는 다름 아닌 한국 대중음악의 해외 열성 팬이다. 아이돌 팬들이 한국어를 번역하지 않고 발음 그대로 알파벳 등 자국의 문자로 표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돌민정음’(‘아이돌’과 ‘훈민정음’의 합성어)은 이제 한국 대중문화의 세계적 인기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현상이 됐다.

 해외 팬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를 최대한 ‘온전히’ 즐기고자 한다. 번역 과정에서 가요 가사 속 단어 고유의 어감이 훼손되거나, 연예인의 발언에 담긴 문화·사회적 맥락이 제거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당장 한국어 터득이 어려운 팬들에게 몇몇 한국어 단어의 ‘말맛’을 고스란히 살린 돌민정음은 유쾌한 돌파구가 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과 위키피디아에 등재된 김치(Kimchi), 소주(Soju), 온돌(Ondol), 한류(Hallyu) 등은 이제 고전이다. 아이돌 그룹 내 특정 멤버만 좋아해서 다른 멤버를 깎아내리는 악성 개인 팬을 이르는 ‘악개(Akgye)’부터 연예인의 사생활을 쫓아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사생(Sasaeng)’까지 열성 팬 문화 속에서만 쓰이는 용어들까지 알파벳의 음가를 빌려 전 세계 누리소통망을 유영하고 있다.

‘막내(Maknae)’도 번역이 되나요.

 돌민정음의 가장 대표적인 용례는 바로 오빠(Oppa), 언니(Unnie), 막내(Maknae) 등 연령이나 나이 차이와 관련된 호칭어들이다. 한국 대중음악 팬들은 음악이나 무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연예인의 인간적 매력과 내력 역시 대중 예술의 일부로 향유한다. 아이돌 그룹 멤버 간 관계성과 서사는 다른 장르의 대중음악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 대중음악만의 고유한 매력이기도 하다. 그룹 내 연령에 따라 ‘리더’부터 ‘막내’까지 각기 다른 개성을 갖는 아이돌 그룹의 팬이라면 이 같은 관계성을 함축한 호칭어가 번역 과정에서 삭제되는 것에 결사반대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해외 팬들은 그룹 내 연장자들을 묶어 ‘형 라인(Hyung line)’, ‘언니 라인(Unnie line)’이라 부르는 데도 거침이 없다.

▲ 호칭어를 설명하는 영상(출처: 한국언니)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형성된 한국인 화자 특유의 표현들이 역시 매끈한 번역어 대신 돌민정음으로 유통된다. 한국 연예인의 성격이나 언어 습관에 대한 호기심뿐만 아니라 이들이 살아가는 사회, 즉 ’한국’에 대한 관심이 낳은 현상이다. ‘아이구(Aigoo)’나 ‘대박(Daebak)’ 같은 감탄사부터 ‘기분(Kibun)’, ‘연습생(Yeonseupseng)’, ‘띠동갑(Tteedonggab)’ 등 한국 사회 특유의 맥락 속에서 유통되는 단어들이 대표적이다.

▲ 맏내로 불리는 가수 진(비티에스)과 나연(트와이스)

 그룹 내 정해진 정체성을 넘어서 의외의 개성을 보여 주는 멤버를 칭하는 팬덤 내 용어인 ‘맏내(맏이지만 막내 같은 특성을 가진 멤버)’ 혹은 ‘막내 온 탑(막내지만 리더처럼 그룹을 휘어잡는 멤버)’ 같은 표현들은 보다 진화된 형태의 돌민정음으로 표현된다. 맏내(Matnae)의 경우 막내(Maknae)와 발음상 혼동된다는 이유로 ‘페이크 막내(Fake Maknae)’로도 쓰인다. 콩글리시 표현인 ‘막내 온 탑’은 그대로 ‘Maknae on Top’으로 표기된다. 잘 알려진 콩글리시 ‘화이팅(→파이팅)’이 ‘Fighting’ 아닌 ‘Hwaiting’으로 역수출된 것과 비슷한 원리다.

 알파벳으로 표기된 탓에 돌민정음은 한국어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영어 문장 속에 녹아든다. ‘눈치가 없다’는 뜻으로 쓰이는 ‘Lack of Nunchi(눈치)’가 대표적이다.

▲ Nugu(누구)의 뜻을 묻는 외국인과 답변하는 팬 번역가

 ‘누구(Nugu)’라는 단어는 ‘누군지 모를 정도로 인지도가 낮은 연예인’을 칭하는 멸칭으로 자주 쓰인다. 예컨대 무대에 등장한 낯선 가수를 두고 ‘He is a Nugu’라고 말하며 얕잡아보는 용법이 대표적이다. 다만 새롭게 주목받는 신인의 의미를 강조할 때면 ‘Half-Nugu’와 같은 복합적 표현도 등장한다.

돌민정음 전파의 숨은 주역 ‘팬 번역가’

 돌민정음은 잘 정리된 언어 체계라기보다는, 외국어로 번역하기 어렵거나 달갑지 않은 한국어 단어들을 ‘소리 번역’하는 방식 자체를 이르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같은 현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트위터 등 누리소통망을 통해 한국 대중음악의 다양한 콘텐츠를 헌신적으로 번역하는 ‘팬 번역가’들의 공이 크다. 누리소통망에서 번역 계정을 운영해 흔히 ‘번역계(‘번역하는 계정’을 뜻함)’로 불리는 이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부른 곡의 가사나 발언을 영어 등 외국어로 번역해 해외 각국의 팬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 사진 제공: 하이브

 해외 팬들은 방탄소년단의 다큐멘터리 영화 <번 더 스테이지: 더 무비>의 딱딱한 공식 번역을 좋아하지 않는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막내 정국을 ‘정국이’라 부르는 것을 정석대로 ‘Jungkook[정국]’으로 옮기거나, 연상 멤버를 부르는 호칭 ‘형’을 생략하는 것 등이 불만이다. 멤버 사이의 친밀감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팬 번역가들은 문법상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Jungkookie[정구기]’라는 번역어를 선호한다. 한국어 화자들만이 느끼는 어감까지도 해외 팬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소리 번역’이다.

 전문 번역에선 보통 옮기지 않는 ‘사투리’도 팬 번역가들에겐 중요한 과제가 된다. 번역계 ‘@BTSARMY_Salon’을 운영하는 프리랜서 번역가 아미살롱(활동명)은 “멤버들이 때때로 ‘무시라꼬’ 같은 사투리를 쓸 때가 있다. 그 순간을 포착해 추가 설명을 덧붙이는 편”이라면서 “설명이 어렵다 싶을 땐, 한국어 사투리를 다룬 유튜브 영상을 연결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국 대중음악 열성 팬의 문화 향유 특성을 정확하게 이해한 ‘팬’이기에 가능한 번역이다. 개인의 언어 습관은 성격, 친분, 성장 환경 등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담겨 있기에 팬 번역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다. 멤버들이 즉흥적으로 하는 말을 일부러 정돈된 문장으로 번역하지 않는 것도, 때때로 쓰는 ‘했습니당, 했어용’ 같은 애교스러운 종결어미를 그대로 살려 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곡의 가사나 메시지, 연예인의 가치관과 사고 방식 등 한국 대중음악 특유의 요소들을 ‘한국 사회’의 맥락 바깥에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 한국어 가사를 영어로 번역해 블로그에 게시한 팬 번역가(출처: muish.wordpress.com)

 팬 번역가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이 소개하는 연예인과 관련이 있는 한국 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애쓴다. 예컨대 방탄소년단 ‘마 시티(Ma City)’에서 자신의 고향 광주광역시를 노래하는 멤버 제이홉의 가사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번역된다. 좋아하는 연예인과 관련된 모든 정보들이 번역 과정에서 최대한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는 해외 팬덤의 마음은 돌민정음을 필두로 한 독특한 번역 문화를 낳았다. 그리고 이 현상은 한국어와 더불어 한국의 역사, 사회, 문화에 대한 지식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냈다.

높아진 한국어·한글 교육 관심

 돌민정음이 한국 대중음악 특유의 열성 팬 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해외 팬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한국어 배우기’ 열기가 특히 뜨겁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 따르면 한국학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은 2007년 632개에서 2017년 1,348개로 최근 10년간 크게 증가했다. 정부 역시 한국어 교육 수요가 매년 확대되는 흐름에 발맞춰 해외 청소년들이 체계적으로 한국어 공부를 할 수 있는 교재를 개발, 보급해 한국어 교육 확대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방침이다.

▲ 런! 코리안 위드 비티에스(Learn! KOREAN with BTS, 출처: 하이브)

▲ 한국 드라마의 대사를 인도네시아어로 설명하는 영상(출처: 반둥오빠)

 외국인 대상 한국어 교육 교재는 일종의 문화 상품으로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일례로 방탄소년단의 소속사 하이브의 교육 콘텐츠 자회사인 하이브에듀는 지난해 8월 ‘런! 코리아 위드 비티에스’를 출시했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을 듣고 따라하면서 한국어 기본 표현과 한국 문화를 익힐 수 있도록 설계된 이 교재는 미국, 캐나다, 일본, 독일 등 30개국에서 약 30만 권이 팔렸다. 상업적으로만 확산된 관심은 아니다. 해외 팬들은 유튜브에서 케이 팝(K-pop)과 한국어 공부를 접목시킨 계정 ‘한국언니’ ‘반둥오빠’ 등을 통해 손쉽게 무료로 한국어 교육을 접할 수 있다.

글: 김지혜(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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