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좋은 글, 듣기 좋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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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좋은 글, 듣기 좋은 말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한 세탁소가 봄맞이 특별행사를 기획하였다. 철 지난 겨울옷이 많이 들어올 때라, 주인은 ‘세탁을 하시면 방충 처리는 무료’라고 문 앞에 크게 붙였다. 주인의 기대와 달리, 며칠이 지나도 매출에 큰 변화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세탁소 주인이 ‘겨울옷 방충 처리를 맡기시면 세탁은 무료’로 표현을 고치자 세탁물이 갑자기 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세탁소에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세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돈을 쓰더라도 세탁이 무료인 쪽을 택하는 것이 더 큰 이득으로 보인다. 현대판 조삼모사인 셈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다.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 방향을 정하여 말하고, 듣는 사람은 그 방향을 해석하는 데 익숙하다. 예를 들어 ‘네 쌍 중 세 쌍이 결혼을 유지한다’와, ‘네 쌍 중 한 쌍은 이혼한다’는 말은 같은 말일까? 비록 같은 말로 보이더라도 결혼이라는 주제에서 어느 측면을 강조하고 싶은지가 다르다. 사실을 전한다는 신문이나 뉴스 기사에도 어감이 실리면 초점이 달라진다. ‘무려, 불과, 겨우’ 등은 그럴 때 주로 애용되는 표현이다. ‘무려 50%’라 할 때는 그 수가 예상보다 상당히 많다는 것을 전제하고, ‘불과 50%, 겨우 50%’는 그 수량이 미미한 상태임을 강조한다. 입말에서 함께 쓰이는 말로는 ‘기껏해야, 고작, 가까스로’ 등이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듣는 사실이나 수 표현을 담담하게 50%로 듣는 이는 없다.
 때때로 한 사람이 무심코 내뱉는 말은 그 사람의 인생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반쯤 마신 물컵을 들고서 “아직 반이나 남았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이제 반밖에 안 남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은 분명히 달라 보인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다른 삶의 방향이 있을지라도, 자신의 가치관을 처지가 다른 남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무려, 불과, 겨우, 기껏, 고작’ 등과 같이 자기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말들이 흔하다는 것을 놓친다.

 한 중국 유학생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한국에서 첫 설날을 혼자서 보내게 되었는데, 그것을 알게 된 한국인 벗이 명절 음식을 챙겨 놀러 가겠다고 연락했다. 쓸쓸하던 차에 반갑고 고마워서 진짜냐고 되물었더니 한국인 친구가 ‘당근이지’라고 답했는데, 유학생은 ‘한국에서는 설날에 당근을 가지고 오나 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당근이지’는 당연하다는 것을 뜻하는 유행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유행어가 있다. 그런데 왜 하필 한국에서는 ‘당근이지’가 전 국민이 다 아는 유행어가 되었을까? 응답의 유행어가 될 정도로 당연할 상황이 정말로 많은 것인가?
 일의 앞뒤 사정을 놓고 볼 때 마땅히 그러하다는 말이 ‘당연’이다. 비슷한 말로 ‘응당’이 있는데, 그렇게 되는 것이 이치로 보아 옳은 것이라는 뜻이다. 누군가의 말이 이처럼 당연하거나 응당한 말이라면 ‘지당한 말씀입니다’ 말고는 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비록 조언이라 하더라도 말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하는 조언은 듣는 사람의 마음에 이르지 못한다. ‘휴가에 집에서 쉰다고? 젊을 때는 당연히 산으로 들로 나가야지.’라든지, ‘소풍에는 응당 엄마가 싸 주는 김밥이지’, ‘애는 마땅히 엄마 손에 자라야지’라고 말하는 순간 대화는 단절되고 둘 사이에는 거리감이 생긴다. 당연하지 않을 상황이 더 많지 않을까? “한 사람만 쌓아도 벽이란 생긴다지만, 나를 향해 벽을 쌓으면 반은 내 책임”이란 노랫말이 있다. ‘무려, 불과, 겨우, 아직, 당연, 응당, 지당, 기껏해야, 고작’ 등은 풍부한 어감을 살릴 우리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목적 없이, 또는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 없이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당연한 일이 과연 다른 이에게도 당연할 수 있을까? 처지가 바뀌면 당연하지 않은 일이 더 많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글: 이미향(영남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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