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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발견 다시 보는 한글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오늘의 발견 다시 보는 한글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한글 창제의 여러 가설 중 하나를 실제처럼 구성한 영화 <나랏말싸미>가 지난여름 많은 논란 속에 개봉되었습니다. 국어원은 한글날을 맞아 일반인의 한글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세종 친제설’(김무봉 교수), ‘세종·신미 합작설’(정광 교수)을 독자들에게 나란히 소개합니다. 이 글들은 한글 창제에 대한 학계의 다양한 의견을 소개하는 것으로, 국립국어원의 의견과는 무관함을 알려 드립니다.

다시 ‘훈민정음’의 창제를 생각한다.

김무봉(동국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올 여름 우리나라의 영화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화제작 중 하나를 들라고 하면, 단연 ‘나랏말싸미’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개봉이 되자마자 역사 왜곡의 시비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에 대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단순하게 정리하면 영화는 영상과 음향에 의해 구성되고 현현되는 예술 작품이다. 그리고 작품의 기반은 창작이다. 따라서 역사물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사실성을 강조하는 것은 예술적 상상력을 빈곤하게 하는 일이 된다. 역사적 사실 여부에 대한 검증은 공부하는 이들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나랏말싸미’는 우리에게 역사에서 소재를 가져온 예술 작품의 작품성 추구와 상상력의 제한이라는 상충된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숙제를 남겼다. 시간을 두고 풀어야 할 과제이다.
 여기서는 영화의 소재가 되었던 훈민정음의 창제와 관련된 사실 관계, 그리고 창제 이후의 정착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실록’이나 ‘해례본’ 등의 공적인 자료에 의하면 영화와는 달리 신미대사(信眉大師)가 창제에 직접 관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물론 이는 기록을 문면 그대로 해석한 결과이고, 행간 너머의 그 무엇에 대한 추측은 논외로 한다. 그런데 불경의 언해 등 현전하는 정음 문헌들에 따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훈민정음의 정착 및 보급 과정에서 신미의 역할이 누구보다 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일련의 사실에 대해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밝혀 나가고자 한다.

실록의 ‘친제’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신미가 창제에 관여했다는 기록은 없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공적 기록에 의하면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가 훈민정음의 창제에 직접 관여했다는 내용은 없다. 다음에 제시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가 그러하고, 『훈민정음 해례본』(1446년 간행)의 ‘정인지 서문’ 등이 그러하다. 특히 ‘실록’에서 친제(親制)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간행된 정음 문헌들을 보면 곳곳에서 신미를 마주하게 된다. 훈민정음 창제 초기에 간행된 정음 문헌의 대부분이 불교 관련 서책이라는 점과 더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간행된 『석보상절』(1447년 간행)을 비롯하여 15세기에 간행된 정음 문헌 40여 종류 중 30종 가까이가 불교 관련 문헌이다. 양으로 치면 80%나 될 정도로 절대적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신미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로 미루어 신미 본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훈민정음이 우리 문자로 자리를 잡아 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때 간행된 불서의 대부분은 한문 경전을 국어로 옮긴 이른바 언해 불경들이다.

신미, 불경의 국어역으로 훈민정음의 보급에 힘써

 신미가 불경의 국어역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 활자본 『능엄경언해』(1461년) 권10 뒤쪽의 어제발(御製跋)에 있는 내용이다.

 이렇듯 언해본의 판밑 원고를 만들 때, 그 번역의 과정은 매우 체계적이면서도 엄격했다. 원전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 책을 번역할 때, 가장 중요한 일은 한문 원문의 띄어 읽기 자리에 훈민정음으로 구결을 다는 일이다. 주상인 세조가 직접 구결을 달면, 신미가 구결이 달려 있는 문장을 확인한다. 그리고 모든 번역의 과정이 끝나고 『동국정운』에 근거하여 한자음을 달면 신미, 사지, 학열, 학조 등의 승려들이 잘못된 번역을 바로잡는다. 그런 후에 임금이 보고 번역을 확정한다. 세조가 한문 원문에 구결을 달고 신미가 이를 확인하였다는 사실은 신미가 불교 경전에 대한 이해가 높은 선지식(善知識)임과 동시에 새로 창제한 문자 및 그 사용에 대한 이해 역시 높았다는 사실의 방증인 것이다.
 이 외에도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1459년 간행) 역기란(譯記欄)의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 역해(譯解)’라는 기록 등이 보여 주듯, 그는 불서들의 언해에서 구결 작성자, 번역자 등으로 활동했다.

경전 보급을 위해 적극 활용된 훈민정음

 조선은 유교 국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의 경서가 아닌, 불교의 경전을 주로 간행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이 되어야 할까? 이때 간행된 불교 경전의 대부분은 언해의 과정을 거쳐서 조성된 언해 불경들이다. ‘언해’는 한문 원문에 정음으로 구결을 단 후, 국어로 옮기는 형식이다. 결국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등장한 독특한 번역 양식이면서 인출 양식인 셈이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동시에 한문 원전을 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음을 알게 해 주는 기록이 있다. 훈민정음이 『해례본』을 통해 알려지기 훨씬 전인 창제의 과정에서 이미 그러한 논의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실록의 기사가 그것이다. 세종이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문에 대해 행한 답변(세종 26년, 1444년) 중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에게 하교한 말을 통해서이다.

 위의 기사는 세종이 백성들의 교화를 위해 간행을 명했던 『삼강행실(三綱行實)』의 언해와 관련된 것이다. 세종을 비롯한 왕실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후 사용 방안에 대해 적잖게 고심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방안의 하나로 일찍부터 언해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새로 제정된 문자의 정착 및 확산을 위해 ‘훈민정음’을 관리 등용 시험인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취재(取才)에 포함시키고, 세조는 성균관 유생들의 학습 과정 중 하나로 만드는 등 왕실을 중심으로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이를 시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한자로 쓰인 한문 문헌을 우리글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인식에 도달한 듯하다. 아래의 기사는 ‘훈민정음’ 창제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지만, 지난날 집현전에서 ‘사서(四書)’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했다는 것이어서 유서(儒書)의 언해 계획이 창제 초기부터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세종의 길, 신미의 길

 어느 시대에나 책을 만드는 것은 독자들의 요구, 곧 수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조선 초기의 사대부들은 비록 유서에 익숙한 이들이었다고 해도, 기층 민중들은 여전히 고려조에서 성행했던 불교를 가까이 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훈민정음 창제 이후 우리 문자에 의한 불경 조성의 욕구가 고려조의 구결 불경을 언해 불경으로 바꾸어 나가게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번역은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번역한 원고를 바탕으로 하여 책을 만드는 일 역시 지난(至難)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문자로 된 책을 만드는 일이 시급했다. 한문 불경에 구결을 달아서 읽던 경험을 살려, 한문 구결을 정음 구결로 바꿈으로써 보다 쉽게 경전의 국어역인 불경의 언해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구결 불경에서 언해 불경으로의 변화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 앞의 기사에서 세종이 언급한 『삼강행실』은 한문본 『삼강행실도』라는 이름으로 1434년에 간행됐었다. 언해본의 경우에는 절행(節行)의 본보기가 되는 인원을 줄이고, 난상(欄上)에 언해를 붙여 1481년에 간행을 하였다. 그런데 사서 등 유교 경서의 언해가 제대로 세상의 빛을 본 것은 그로부터 한 세기가 훨씬 더 지난 뒤인 1590년대의 일이다. 어명을 받들어 언해에 착수하고서도 15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언해본 책으로의 간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번역의 과정과 언해본 책 간행의 일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훈민정음 창제 후 많은 종류의 불경들이 한글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불경의 언해 과정에서 필요한 이는 한문 불경에 조예가 깊은 선지식이면서 훈민정음에 대한 이해가 남다른 이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당대의 고승인 신미가 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로 보건대 훈민정음은 세종의 친제이고, 신미는 훈민정음의 정착 및 확산에 공이 큰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한글을 창제한 업적뿐만 아니라, 오늘의 한글이 있게 만든 공로 역시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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