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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 온라인 소식지 쉼표, 마침표.

한국어 수업을 듣는 학생들 놀라운우리말

국어 교실에서

한국어 교실에
떨어진 밀알 하나

권한밀

사과와 나비

“내가 배운 학문이 세상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던 대학원생의 관심은 한국어를 잘하지 못해 피해를 입고도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향했다. 나의 마음은 어느새 문학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문학치료학’이라는 학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국어 교원이 되어 처음으로 한 일은 고향에 있는 작은 대학에서 초급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첫 수업에 들어가 한 학기 동안 가르치게 될 학생들에게 뭐라고 인사를 하면 좋을까 며칠을 고민했었다. 지금도 새 학기가 시작될 때면 늘 긴장과 설렘이 있지만 그 순간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며칠을 고민하던 나는 동화책 한 권을 책장에서 꺼냈다.

사과와 나비

사과와 나비

한국어를 전혀 모르던 학생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한 뒤, 한 장 한 장 넘기며 동화책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칠판에 “여러분도 언젠가는 나비가 될 것입니다.”라고 써 주었다. 더러 한국어를 조금 배우고 온 학생들은 열심히 이 말을 공책에 썼다. 한글을 쓰지 못하는 학생들도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이상의 것을 이해해 주던 학생들……. 그리고 그 학기 마지막 수업 시간에 내가 다시 동화책을 꺼냈을 때 학생들은 반가운 마음으로 나의 뜻을 다시 헤아려 주었다.

그때 그 학생들의 끄덕임, 공감의 눈빛을 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첫 학기 학생들이 보여 준 선생님에 대한 공감과 신뢰, 투박하지만 의미만은 가득했던 감사와 사랑에 대한 표현은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내내 좋은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사진

사진

익숙한 것들의 역습

사진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은 힘든 노동인 동시에 즐거움이기도 하다. 외국어 학습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나에게 아주 익숙한 것 이외의 것을 익혀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이는 동시에 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기도 하며, 인생이 더 흥미진진한 것들로 채워져 가는 경험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외국어를 배워 외국에 여행을 가 보면 이 사실을 쉽게 인정하게 된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힘듦으로도 다가오지만 이 얼마나 신기하고 흥미로운 일인가.

한국어 교원이 된 초반만 해도 나는 그저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에 불과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해서 가르치는데, 내가 이렇게 학생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애쓰는데 그걸 받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독선적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야말로 열심히 잘 가르치기 위한 열병에 걸렸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교수님과의 대화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교수님이 나에게 던진 질문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외국인이 ‘단풍’이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 주실 거예요?”
“가을이 되면 나뭇잎들이 초록색에서 빨간색으로…….” 칠판에 열심히 단풍잎을 그려 가며 설명했다.
“단풍은 빨간색만 있나요? 은행잎은 노란색으로 변하고, 또 어떤 건 갈색이던데…….”

그랬다. 나는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만 열심을 다해 가르쳤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나 외국인의 입장 – 특히 한국에서 사계절을 처음 경험하게 되는 - 이 되어서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내 얼굴이 익숙한 단풍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더불어 한길

12년이 흐르는 사이, 나는 결혼을 해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결혼과 육아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해 주었다. 육아에 전념한 26개월 동안 나는 ‘까까, 찌찌, 빠빠’ 말고 다른 유창한 말들이 하고 싶었다. 머릿속에 이동식 칠판을 하나 세워 두고 왼쪽 위 가장 끝에서부터 오른쪽 가장 아래 끝까지 문법들을 설명하고 예를 들고 유사 문법을 비교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내 학생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내가 누구보다도 열심히 한국어로 4시간 열강을 하고 있을 때 ‘아, 저 어렵고 낯선 외국어 말고 유창한 모국어로 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들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자연스러운 욕구를 받아들이지 못한 나는 “교실에서는 모국어를 사용하지 마세요. 한국어로만 이야기해요.”라는 규칙을 만들고, 어쩌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를 던지는 학습자를 예의 없는 학생으로 단정 짓고 괘씸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학습자들의 고충을 진지하게 공감해 주고 배려해 주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육아 휴직을 마치고 다시 교단에 섰을 때, 처음으로 한국어 교원이 되었을 때보다 더 떨리고 긴장이 됐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교재 그리고 교실을 채우고 있는 신세대들, 거기에 이제는 ‘생()’, 그저 날것일 수만은 없는 여러모로 바뀐 나의 처지와 상황들까지, ‘어떻게 이 수업을 재미있게 하지? 어떻게 의미를 전달하고, 어떻게 배운 걸 이용해서 다 한 마디씩 말하게 할 수 있지?’ 교수님께서 나에게 던져 준 화두들을 풀어 나가기 위해 매 수업시간마다 전전긍긍하며 고민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말이다. 답은 이 짧은 글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칠 수 있지?’에 대한 답은 나를 낮추고 한국이란 낯선 곳에서 언어적, 문화적, 사회적 약자인 학습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의 학생들은 내가 최선을 다해 가르쳐 준 것이라도 한 번 가르쳐 준 것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고, 똑같은 말을 10번을 들어도 10번 모두 다른 말로 들을 수 있으며, 말을 잘 못해서 아이 같지만 사실은 속 깊은 나와 같은 어른이라는 것, 그래서 학생들은 선생님이 그런 자신들의 생각과 마음을 읽어 주었을 때 선생님을 충분히 배려해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고 또 기억하면 된다.

더불어 한길

다시 사과와 나비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앞서 이야기한 『사과와 나비』라는 동화는 사과에 흠집을 내며 사과를 먹고 자란 애벌레가 사과 밖으로 나가 여러 과정 끝에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나비는 사과꽃에 꽃가루를 옮기는 역할을 하게 되고 결국 다시 사과 열매를 맺게 해 준다는 것이다.

나비

사과

언어를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언어를 가르칠 때 언어 이상의 것들을 배우게 될 학생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 일은 언어를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과학적이며 풍부한 표현력을 가진 아름다운 언어, 그런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그 언어를 통해 언어에 묻어 있는 좋은 ‘사람’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으면 한다.

나는 과연 지금 어디쯤에 있는 누구일까? 흠집 난 사과일까? 사과 속 애벌레일까? 그렇다면 나비가 되기 위한 인고의 과정을 겪고 있을까? 나비가 되어 이곳저곳을 날고 있을까? 아님 사과 꽃에 앉았을까?

나와 함께 이 동화를 읽었던 학생들은 지금쯤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나비가 되었을까? 날카로운 질문으로 나를 더욱 연구하게 하고 더 고민하게 했던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추운 겨울 밀린 아르바이트비를 받았다며 자기 나라 음식을 손수 만들어 대접해 주었던 그 살갑던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귀국한다며 먼 길을 찾아와 인사를 건네던 정 많던 친구는 잘 살고 있을까? 새삼 친구라 부르고 싶은 나의 학생들은 원하던 자신의 꿈을 이루었을까? 10년 넘는 짧고도 긴 시간을 사과와 나비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우리를 이어 주는 것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글_권한밀
‘한 알의 밀알’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다해 살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고 있다.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였고, 지금은 부경대학교에서 한국어와 교양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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