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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 온라인 소식지 쉼표, 마침표.

비빔밥 궁금한우리말

맛의 말, 말의 맛

‘비빈밥’과 ‘덧밥’

  ‘문법 나치(Grammar Nazi)’를 우리말로 뭐라 바꿔야 할지 모르겠으나 누구나 이런 사람이 되어 본, 혹은 이런 사람한테 당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굳이 문법이 아니더라도 맞춤법이 틀린 표기를 보면 빨간색으로 고쳐 주고 싶다. 반대로 사소한 맞춤법을 틀려 지적을 받으면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말과 글에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식당에 가서도 본의 아니게 문법 나치 혹은 맞춤법 나치의 역할을 하게 된다. ‘찌게’를 보면 ‘찌개’로 고쳐 주고 싶고, ‘곰탕’을 영문으로 쓴답시고 ‘Bear Soup’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보면 주인장을 불러내 따지고 싶다. 그런데 어느 허름한 식당의 비빔밥과 덮밥 표기를 보았을 때 정말로 주인장을 흘깃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존경의 눈으로…….

  1997년 옌볜 조선족 자치주 옌지시의 한 음식점, 점심때가 되어 현지 사람들의 말대로 ‘때를 쓰러’ 한 조선족 식당에 들어갔는데 벽에 무심한 듯 쓰여 있는 글씨를 한참이나 쳐다보게 되었다. ‘비빈밥’이라니……. 틀렸다. 아무리 고국을 떠난 지 오래되었어도 ‘비빔밥’이 맞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리고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수록 오히려 ‘비빈밥’이 맞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 들어 오고 배워 오다 보니 놓치고 있었을 뿐 사전에 올라 있는 ‘비빔밥’보다 식당 주인이 흘려 써 놓은 ‘비빈밥’이 맞다.

‘비빔밥   비빔밥에 대한 얘기는 늘 기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원조에 대한 논쟁으로 끝이 난다. 비빔밥이 문헌에 ‘골동반(骨董飯)’으로 나타나니 중국의 음식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기원론의 시작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음복설’, ‘동학혁명설’, ‘궁중음식설’, ‘묵은 음식설’, ‘농번기 음식설’ 등까지 이어진다. 한편 어느 지방의 어떤 식당이 처음 비빔밥을 팔기 시작했는가에 대한 논쟁은 ‘원조’를 넘어 ‘진짜 원조’, ‘원조 중의 원조’, ‘이 집만 원조’라는 말까지 억지로 지어내며 소모전만 치른다. 그 탓에 음식의 기원과 이름에 대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 버렸다.

  이름이 먼저인가, 음식이 먼저인가의 문제는 따져 볼 필요도 없이 답은 명확하다. 음식이 먼저이다. 우리의 밥상에서 ‘비비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가 될 수 있다. 밥상 위에 밥과 찌개, 반찬, 젓갈과 각종 장류가 있다. 넓고 오목한 숟가락이 있으니 찌개나 장을 떠서 밥에 얹든 비비든 할 수 있다.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젓가락이 있으니 먹고 싶은 반찬과 젓갈을 집어 역시 밥에 얹어 먹어도 되고 비벼 먹어도 된다. 언제 어디서 누가 최초로 했는지 따질 필요도 없이 아주 오래 전에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비벼 먹었을 것이다. 결국 논쟁은 이름에 대한 기록과 팔기 시작한 식당에 대한 것일 뿐, 음식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다.

  언제 누가 붙인 이름인지는 몰라도 ‘비빔밥’이란 이름에 대해서는 꼼꼼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너무 익숙해져서 간과하기 쉽지만 ‘비빔밥’은 우리말의 어법에 영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한글 표기형은 ‘부븸밥’이다. ‘비비다’가 15세기 문헌에는 ‘비븨다’로 나타나고 오늘날 ‘부비다’란 말도 쓰이니 ‘부븸밥’은 표기의 문제일 뿐이므로 ‘부븸밥’에 쓰인 ‘부븨다’는 ‘비비다’로 봐도 별문제가 없다. 문제는 ‘비빔밥’의 구성에 있다. ‘비빔밥’이 ‘비빔’과 ‘밥’으로 나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밥’에 문제가 없으니 ‘비빔’에 문제가 있다. ‘비비다’와 ‘밥’이 모여 하나의 말로 만들어지려면 ‘비빈 밥’이나 ‘비빌 밥’ 혹은 ‘비비는 밥’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우리는 ‘비빔밥’에 익숙해져 있다.

  이를 두고 ‘비빔’이란 말이 먼저 있다가 ‘밥’과 결합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음식 중에 ‘계란찜’과 ‘찐 계란’이 엄연히 다르고, ‘찐 계란’을 ‘찜계란’이라고 하는 것이 영 어색한 것을 생각해 봐도 ‘비빔밥’은 이상하다. 식당 주인은 이런 생각 때문에 ‘비빈밥’이라고 써 놓은 것일까? ‘비빈밥’을 빨리 발음하면 [비빔밥]이 되니 발음도 별문제가 없다. 할아버지 대에 고국 땅을 떠날 때 함께 간 말이 그 사이 많이 변하기도 하고 잊히기도 했을 텐데 이렇게 섬세하게 많은 것들을 따져 보았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사소한 표기 하나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주기는 한다.

  2005년 여름 방언 조사를 끝내고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전라북도 고창의 한 음식점, 여기서도 국어 선생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표기가 차림표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저육덧밥’이 그것이다. ‘저육’ 옆에 친절하게 한자로 ‘豬肉(저육)’이라고까지 써 놓았으니 흔히 ‘제육’이라고 쓰는 것의 본래 표기를 아는 유식한 주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덮밥’이 아닌 ‘덧밥’이라니…….

‘비빔밥   덮밥은 우리의 전통적인 음식은 아닌 듯하다. 요리를 소개하는 여러 책을 봐도 덮밥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덮밥’이란 말이 없었다는 것이지 덮밥과 비슷한 방식으로 밥을 먹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밥과 반찬으로 구성된 우리의 음식 문화니 밥 위에 반찬을 얹으면 덮밥이 된다. 일본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덮밥도 비빔밥처럼 비벼 먹지만 비비기 전에는 덮밥이다. 그릇이 없거나 설거지가 귀찮으면 밥 한 그릇에 반찬을 대충 얹어서 먹을 터이니 덮밥과 비슷한 형태의 밥이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은 쉽게 추측이 된다.

  문제는 역시 ‘덮밥’이란 말이다. 당연히 ‘덮다’와 ‘밥’이 합쳐진 말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덮밥’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비비밥’도 그래야 한다. 나아가 ‘끓는 물’도 ‘끓물’이어야 하고, ‘먹는 물’도 ‘먹물’이어야 한다. 우리말에서는 ‘덮다’, ‘끓다’, ‘먹다’ 등과 같이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 ‘밥’, ‘물’ 등과 같이 사물을 뜻하는 말과 직접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 ‘끓는 물’, ‘먹는 물’처럼 중간에 연결시켜 주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덮밥’에는 그러한 것이 없다.

  주인장에게도 ‘덮밥’은 영 마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말의 일반적인 어법에 맞지 않으니 말이다. 주인은 고민 끝에 받침 하나를 바꾸어 ‘덧밥’으로 써 본다. ‘덧’은 ‘덧버선’, ‘덧문’, ‘덧씌우다’ 등에 쓰이니 ‘덮다’의 의미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고 어법에도 잘 맞다. ‘덧밥’은 빨리 발음하면 [덥빱]이니 ‘덮밥’의 발음과 완전히 일치된다. 주인장은 만족해하며 자랑스럽게 ‘덧밥’이라 써서 메뉴판에 올린 것이다. 사전에 ‘덧밥’은 ‘먹을 만큼 먹은 뒤에 더 먹는 밥’이라 풀이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무도 쓰지 않는 말이니 문제될 것은 없다. 오히려 주인장의 우리말 감각과 실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맞춤법 나치’의 관점에서 보면 ‘비빈밥’과 ‘덧밥’은 틀린 표기다. 반대로 ‘어법 나치’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맞는 표기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을 규범으로 정해야 한다는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다. 맞춤법이든 어법이든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라 그것을 쓰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맞춤법과 어법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필요하고, 그 속에서 좀 더 고민하고 자유롭게 쓰려는 시도도 필요하다. 물론 진짜 나치가 되어 원활한 소통을 방해한다거나 너무도 자유롭고도 창조적이어서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안 될 일이다.

글_한성우(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이 글은 필자가 2016년에 펴낸 우리 ≪음식의 언어≫(어크로스)에서 일부를 추려 내어 다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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